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
Original Owner, Injeongsangwan
아래 갈색 글씨는 증산계열 사이트에서 발췌하여 가져왔다.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은 전북의 정읍에서 해방의 시점과 국가의 대전란(6.25)을 예고하는 등 신이한(神異)한 예지력과 도력을 보이고 생을 마쳤다. '인정상관'께서는 '공사(公事)'라는 형태로 자신의 도력을 행사하였는데, '공사(公事)'란 어떤 상징물의 조작을 통해 그 상징과 대응하는 실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신적 행위를 말한다.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은 종교(宗敎) 단체 자체를 부정하였다. 본주(本主)에게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녀는 전북의 정읍에서 조선 해방(1945)의 시점과 한국 전쟁(1950)을 예고하는 등 신이(神異)한 예지력과 도력을 보이고 생을 마쳤다.
본주(本主)가 행하셨던 공사의 내용 중 가장 큰 공사는 장차 한민족(韓民族)이 세계 문명의 종주국이 된다는 것인데, 현재 서구의 문명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으로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의(禮義) 도덕(道德)’과 ‘효행(孝行) 박애(博愛)’ 사상을 통해 달성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세상이 ‘사람의 도리(道理)’에 의해 지배되고 ‘한민족(韓民族)이 사용하는 한국어(韓國語)가 세계 만민을 움직이는 말이 된다’고 한다.
그녀는 스스로 종교 조직을 형성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는데, 그의 사상을 집약해서 표현하면 “종교(宗敎)를 갖지 마라! 자신이 곧 미륵(彌勒)이다” '기존 종교를 거부하고 토속의 고유 정신과 고유 생활 문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김동규씨는 인정상관을 자주 뵙고 가르침을 구했다고 한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본주(本主)께서는 길에서 10cm 정도 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1950년 02월 19일(음), ‘대한민국에서 3개월 후면 전쟁이 나니, 관원들은 직장을 그만 두고 피신하라는 경세 광고문을 전남 장성군 북일면 지서 공고판에 써 붙이다가 국가보안법 유언비어 유포죄로 일행이 체포되어 본주(本主)외 11명이 연행되었다. 장성 경찰서 취조시에 ’무슨 도(道)를 믿냐?‘고 물으니, 선도(仙道)라 하시고, 도주(道主)가 누구냐고 물으니 증산(甑山)! 다시 물으니 강증산(姜甑山)이라고 답변하시었으며, 구속된지 49일만에 석방 되시고 일부는 6.25 사변이 일어난 후 석방되었다.
증산(甑山) 상제님 생존 제자 박공우(朴公又) 선생의 부인 말에 의하면, ‘어느날 수련을 하니 본주(本主) 인정상관님이 보이는데 천상의 관세음 보살로 보이시며, 금빛 찬찬한 가운데 어머어마하게 보였다. 생존시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계시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무서운 어른인줄 몰랐다.’ 라고 했다.
"말과 행동은 천지(天地)에서 보고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말을 아껴야 하며, 호언하고 실행치 않으면 죄가 된다. 애 쓴 것 몰라 준다고 한탄해서는 안 돼. 애쓰면 애 쓴 만큼 덕이 되고 복이 된다. 너희들은 몰라도 신명(神明)은 알어! 도(道) 닦는다고 조용한 곳에 길들여지면 음지(陰地) 식물이 되어서 햇빛을 보면 시들해 져! 참다운 수행을 할려면 생활 속에서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고 덕행을 해야 해!"
“신명이 들판에 나락 모(茅) 서 있듯 많고 많아.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 관찰하고 있는 신명이 있으니 좋은 일 많이 해!” “신명 대접할 때에 골고루 한다고 적게 올리지 말고 한 두가지라도 많이 올려야 한다.”
아래 하늘색 글씨는 인정상관의 일대기를 그린 ≪본주 상,하권≫의 내용을 요약하였다.
인정상관의 탄생과 선화
1887년 3월 19일 경상도 하동읍 화심리에서 여자 아이가 탄생했다. 그 아기의 모친인 이씨 부인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어릴적에 죽어버렸다. 마흔이 넘은 부부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매일 청수를 올려 천지신명께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천왕봉을 찾은 이씨 부인은 갈증을 느껴 계곡 물을 마셨는데 그 순간 목구멍으로 무엇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이후 몸이 나른해지고 후끈거림을 느꼈고 산을 내려오던 중 있던 곳을 돌아보니 커다란 무지개가 뻗쳐 있고 아름답고 찬란한 빛에 빠져들어 넋을 잃었다. 이날 밤 이씨 부인의 꿈에 둥근 달이 품속에 들며 "만의 아들을 부러워 말라." 라는 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로부터 이씨 부인은 잉태가 되어 배가 불러왔고 아기를 낳을 즈음엔 낯모르는 여인 둘이 찾아와 도왔다. 출산을 한 후 낳은 아기를 보니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한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기의 온몸에는 은빛과 같이 윤택한 털이 있었고 등에는 검푸르면서도 번쩍거리는 털의 반점이 둔부까지 나 있었고 코는 코끼리와 같이 길었고 손발은 말의 발굽과 같았고 눈은 형형했는데 아기가 울지도 않았다. 이씨 부인이 아기를 보고 혼절하려는 순간 두 여인이 붙들고 달래며 말하였다.
"이 아기씨는 바로 구천상제께서 부인의 몸을 빌어 막(맥이)으로 탄생한 것이오. 불원간에 이 허물을 벗을 것이니 그에 대하여는 심려치 말고 정성을 다하여 길러 주시오." "바라건데 다음에 아기씨가 말을 하거든 그 말하는 바를 다 잘 들어 주시오." 두 여인은 이런 말들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이때가 고종 24년 정해년 (서기 1887년) 3월 19일 이었는데, 우리나라를 병탄코자 야심을 보이던 영국이 남해에 주둔시켰던 거문도 점령군을 철수하여 돌아간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맥은 대개 구리나 쇠를 먹고 사는 짐승인데 본초강목에 이르기를, "곰과 같고 사자의 머리에 승냥이 털을 지녔으며 갈기는 날카롭고 다리는 짧다. 그 똥으로 칼을 만들면 가히 옥을 끊을 수 있고 오줌은 능히 무쇠를 녹여 물로 만든다." 하였다. 이러한 신수가 항상 우리의 원시 조상 곁에 있으면서 질병을 막아 주고 생명을 보호하며 지혜를 일깨워 주었다. 그 원인인즉 맥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토굴 안의 습기가 없어지고 나쁜 기운이 사람에게 침노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이 밖에 나가면 늘 따라다니며 맹수를 물리치고 독충을 제거하였다.
사람은 그것이 쇠를 찾아 먹고자 하여 광석을 깰 때 일어나는 불꽃을 보고 비로소 불을 사용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뒷날에는 그 불을 이용하여 쇠를 녹이고 단련하는 법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 신령한 짐승을 숭상하게 되었고 뒷날 중국인들은 우리를 가리켜 '맥족'이라 일컫게 되었다. 또한 우리 동방의 맥족들은 활을 잘 쏘았고 활을 잘 만들었으므로 중국인들이 우리를 가리켜 '동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그 활을 '맥궁'이라 일컬었다. 송대의 육세는 말하기를, "맥의 가죽으로 앉는 방석이나 깔고 눕는 요를 만들어 사용하면 능히 막외의 사기를 소멸시키므로 '막'자로 쓴다." 하였다. 이는 바로 외부로부터 뜻밖에 침입해 오는 사특한 기운을 막아 준다는 말이다. 때문에 맥을 막아 준다는 '막' 자로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말에 무엇을 막아낸다는 말을 '맥이' 또는 '막이'라 하여 '액맥이, 살막이' 등의 말이 있는데 이는 다 그 신령한 짐승으로부터 비롯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은 아기가 입고 온 맥의 가죽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를 극히 금하며 살았다. 아기의 모습을 누구라도 본다면 그 동네에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온다는 기척이 있기도 전에 아기가 스스로 몸을 잘 숨겨주었다. 누가 와 있는 동안에는 숨소리조차 없이 있다가 그가 집을 떠난 연후에야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남의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아기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그 괴이한 짐승의 허물을 벗었다. 아이가 그 허물을 벗을 때는 말의 발굽과 같은 손으로 머리 위를 긁적거리니 순식간에 그 허물이 위에서 아래로 홀랑 벗겨졌고, 비로소 백옥같이 고운 피부가 드러나면서 완연한 사람의 형색을 갖게 되었다. 이씨 부인은 그 허물을 없애야 겠다고 마음 먹을 때 마다 가슴이 떨리고 오금이 저리며 무서움증이 몰려와 걸음조차 옮길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날 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 허물에 손도 대지 못하였다. 어느날 아이가 "내 옷 주세요." 하였고 그동안 말이 없던 아이가 말을 한다는 것에 놀람과 기쁨으로 어안이 벙벙 하였다. 그 허물을 가져다 주자 아이는 조막손으로 그것을 잘 개어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 궤 안에다 깊이 간직하였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조선 민중은 희망을 잃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정읍에 위인이 출현하여 장차 나라를 찾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위인의 이름은 차경석이었고 호는 월곡이었다. 신장은 9척이나 되었고 고매한 인격에 기걸찬 인물이었다. 경술년에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은밀히 교단을 만들었고 태을주를 외었기에 태을교라 불리었다. 불과 5~6년 사이 교도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식은 후 차경석은 60방주라는 간부조직을 만들었고 조직 인원 총수는 557,7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1921년 9월, 차경석은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천제를 지내고 구호를 시, 교명을 보화라 할 것을 선포하고자 했다. 이성영의 기록에 의하면 제단이 9층이었고 제수로 소가 7마리, 돼지가 23마리가 쓰였다고 하니, 그 얼마나 대규모의 의식이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천제를 봉행하던 중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인정상관과 관련한 일이다. 김정화는 이를 기록으로 전하였다.
"황석산에서 보천교주 차월곡이 천제를 지내는데 홀연히 본주(인정상관)께서 나타나 '까마귀(일본 경찰) 오니 퍼뜩 피하라' 하시고 떠나셨다. 이에 심상치 않게 여긴 차월곡은 그가 곧 신인임을 깨닫고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수소문하여 그 신인을 찾고자 했으나 알 길이 없어 다만 신령이려니 하고 체념하였다."
완연한 인간으로 화한 아이는 스스로 '인정상관'이라 하고 가끔 혼자서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어를 하기도 하였다. 인근 사람 중에 인정상관을 남달리 본 사람이 있었다. 영천 고을의 토박이인 권 감역이 친구인 배 진사의 집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인정상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박학다식한 권 감역은 인정상관을 한번 보자 대번에 그가 천상의 정기를 한몸에 타고났음을 간파하였다. 마침 그의 아들이 상처하여 홀로 지내는 중이었으므로 그는 이 처녀를 며느리로 맞이할 요량을 하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매파를 그 집으로 보냈으나 인정상관은 거절을 하였다. 며칠 후 권 감역이 보낸 사람들이 많은 예물과 사주단자를 가지고 인정상관 모녀에게 들이닥쳤다. 권 감역이 막무가내로 혼인을 성사시키려 들자 이씨 부인은 밖에 나가 인력거를 불렀고 인정상관은 궤 안에 간직해 두었던 자신의 옷보따리를 꺼내들고 나섰다. 그러나 바로 앞을 가로막는 권 감역의 하인들이 인력거를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틈에 어느 길가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인정상관은 어머니의 옆구리를 팔로 꽉 껴안았다.
"눈을 꼭 감고 뜨지 마시소."
이씨 부인이 눈을 꼭 감자 갑자기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발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리는데 하도 무서운 느낌이 들어 이씨 부인은 눈을 뜨려 해야 뜰 수도 없었다. 이윽과 바람소리가 잦아들자 인정상관의 말소리가 들렸다.
"인제 눈 뜨시소. 여기가 전라도 정읍 땅이라예."
하여 이씨 부인이 눈을 떠 보니 과연 난동을 부리던 자들이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생전 처음으로 보는 낯선 곳에 모녀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정읍 대흥리 정자 나무 아래였다. 이 때 모녀의 모습을 본 중년의 선비가 있었다. 그 선비는 보천교 60방주에서 최고급 간부에 속하는 목주인 김홍규였다. 그는 황석산 천제 때 인정상관이 불현듯 나타나 보천교주에게 일본 경찰의 출현을 경고해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으므로 인정상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천교에서 마련해준 집에서 살던 인정상관은 교주와 혼인해주기를 간청받는다. 그러자 인정상관은 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들 선생한테 해인이 있다 하던가?"
인정상관은 그 어머니 이씨 부인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존대말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나이나 학식 따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찾아뵙고 말하기가 참으로 곤란했다고 한다. 인정상관이 뜻밖에 해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하나가 나서서 답하였다.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에게 해인도 없다는데 자네들이 우예 대사를 꾀한다 하노? 맘 고쳐묵고 돌아들 가."
인정상관이 말하는 해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라를 전하는 보물로서 먼 옛날 환웅천제 때 여러 종족이 모여 상의한 끝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도지>에 아래와 같은 사실이 전한다.
"여러 종족이 방장산 방호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캐내어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이라 하여 칠난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 칠색 보옥에 천부를 새긴 도장은 진실로 불함삼역의 특별한 산물이며 사해의 여러 종족에게 하늘이 베풀어 준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정상관은 해인의 있고 없음으로써 천명의 유무를 상징하여 그 엉뚱한 자들을 물리치고자 한 것이다. 인정상관이 해인을 거론하며 그들의 뜻에 정히 응하지 않자 그들은 다른 식으로 인정상관을 몰아부치려 하였다.
"지금 사시는 이 집도 우리 교중에서 마련해 준 것이요, 그동안 두 모녀의 생활을 보살펴 온 것도 우리였으니 마땅히 이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도리가 아니겠소? 무엇으로 갚으시려오?"
이에 인정상관은 답하였다.
"어찌 그것이 그대들 것인가? 천지 것이다."
이후 시기 별로 인정상관의 천지공사가 책에 기록되어있고 숱한 기행과 이적과 공사로 이어진 한 신인의 생애가 마감되었으니 그때가 곧 단기 4287년(서기 1955년) 갑오년 음력 12월 23일 새벽이었다.
아래 내용은 ≪본주 하권≫의 내용 중 흥미로운 일화를 발췌하였다.
본주님이 문도들에게 "하늘의 공덕은 삼십이요, 땅의 공덕은 육십이니라." 하고 이어 "땅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하늘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하였다. (하권 76p)
본주님이 문도들에게 배밭에 있는 샘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생명수를 수리해라."
하여 문도 몇 명이 샘물을 퍼내고 더 깊이 파 수리하고 있으니 본주님이 이르기를 "이 일이 끝나면 신기한 일이 많이 나온다." 하고 이어서 "만 중생의 생명을 살리는 게 물이다." 하였다.
본주(本主)께서 운명하시던 날(1954.12.23)부터 금산리 일대의 우물이란 우물이 다 말라 바닥이 드러났는데 다만 한군데 샘만이 마르지 않고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인정상관댁 앞 배밭에 있는 우물이었다. 이런 기현상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어 그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의 마을 주민들까지 다 그 물을 길어다 먹고 살 수가 있었다. 한데 그 샘이 바로 옛날에 인정상관이 '생명수'라 이르고 다시 손볼 것을 명하여 보수해둔 그 샘이어서 사람들은 새삼 그 어른의 유덕에 고개를 숙였다. (하권 74p)
9월 3일 본주님이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본주님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으로 문도들을 보고 있었다.
"내가 병신인 줄 아나? 너희가 나를 믿었제?"
'믿었제?'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신앙하였으냐는 뜻이었다. 본시 인정상관은 무슨 교를 꾸미어 교주 행세를 하는 자들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병신으로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인정상관은 이 말로써 문도들에게 스스로 병신이 아님을 밝히고 문도들이 자신을 교주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나무란 것이다. (하권 56p)
전주 경찰국에서 찾아온 경관 세 사람이 본주님을 뵙고 물었다.
"우린 무엇을 하면 잘살겠습니까?"
그러자 본주님이 말하였다.
"땅벌이를 해."
농사를 지으라는 말씀이었다. 하여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는 경찰관이라 농사에는 경험도 없으니 장사나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본주님이 말하였다.
"장사도 땅벌이 장사 해야 해."
당시 그들은 경찰이라는 직책에 상당한 회의를 느끼고 인정상관을 찾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그들에게 인정상관은 가장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농사를 짓거나 농산물을 취급하는 장사라고 이르신 것이리라.
예로부터 뭇 성자들이 다 하늘을 공경한 데 비하여 인정상관은 하늘에 먼저 땅을 공경하였다. 때문에 그는 '땅하늘'이라 하였고 추종자들에게도 '땅하늘이 더 무섭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그의 이상은 만물이 모두 땅을 의지해야만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하늘에 앞서 땅을 더 중하게 여긴 것이리라.
그러기에 그는 누구라도 땅을 함부러 대하면 나무랐다. 혹 그가 보는 앞에서 뜨거운 불덩이를 갑작스레 땅에 놓는다거나 땅이 울리게끔 무거운 것을 쿵하고 놓으면 그는 발연히 노하여 "땅님이 놀래지 않겠느냐!" 하고 꾸중하였다고 한다. (하권 33p)
경상도에 사는 정치일이라는 문도가 본주님을 찾아왔다. 그는 인사를 드리고 여문도 박차성이 어른께 전해 드리라는 명주베 한 필을 바쳤다. 그런데 본주님은 그걸 받지 않고 물었다.
"불평이 없겠는가?"
"......"
본주님은 또 정치일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거듭 물었다.
"불평이 없겠는가?"
그러더니 그것을 정치일 앞으로 도로 밀어내었다.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하여 정치일이 그것을 도로 받아 가지고 어른 앞을 물러나왔으나 가지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원래 박차성이 본주님의 큰 은혜를 입고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겠다는 뜻으로 각별히 전해 주기를 부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그것을 우선 용화동에 사는 친구집에 맡겨 두고 돌아갔다. 다음에 와서 다시 어른께 드려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박차성이네 집에서는 난리가 일어났다. 그 명주베는 박차성이 시어머니 모르게 빼돌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족쳤다. 며느리는 사정을 말하고 용서를 빌었으나 통할 리가 없었다. 무조건 찾아오라 하였다. 박차성은 이미 본주님께 바친 것을 도로 찾아와야 한다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빠져 자책을 하고 있었으나 실은 다행히도 그 명주베는 정치일의 친구집에 잘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치일은 그것을 다시 찾아다가 박차성의 곤경을 면하게 해 주었다. (하권 24p)
인정상관이 가끔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음식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어느 때는 밀가루로 칼국수를 만들어 제를 지내는가 하면 어떤 때는 깨죽을 쑤어 놓거나 감자, 고구마 등을 쪄 놓고 제를 지내는 때도 있었다. 제를 드리는 신명의 수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어느 때는 세 그릇을 차려 놓는가 하면 어느 때는 열여덟 그릇까지 차려 놓고 제를 지내는 때도 있었다. 다만 감자나 과일 등으로 제를 지낼 때에는 큰 그릇 하나에다만 담아 놓고 지냈다.
인정상관은 이렇게 친히 만든 음식으로 제를 지낸 후 그 음식을 문도들에게 나누어 주지도 않고 며칠씩 젯상에 그대로 두는 때가 있었다. 그리하면 자연 그 음식이 다 상하여 파란 곰팡이, 빨간 곰팡이가 잔뜩 끼여 있고 보기만 해도 심히 역겹기 바련이다. 인정상관은 그러한 음식을 문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으라고 하는 때가 있었다.
한데 그 음식이 첫숟갈만 약간 비위에 거슬리고 냄새가 났을 뿐, 일단 한번 삼키고 나면 두번째 숟갈부터는 구미에 딱 맞아 전혀 역겨운 줄을 모르고 먹을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 먹고 나면 시원한 트림이 나왔고 입안에서 기이한 향내가 났다. 하여 추종자들은 어른께서 그러한 음식에다가도 무슨 특별한 기운을 넣어 주는 것으로 알고 다들 기꺼이 먹었다고 한다.(정연종의 증언) (하권 17p)
아래 내용은 ≪맥이≫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인정상관은 추종자들이 다른 종교인들처럼 주문이나 괴이한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고 다만 수련하라는 말씀만 하였으므로 임제관은 인정상관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그 동정을 살펴 몇몇 도우들과 함께 금산사 부근의 누릉골에 가서 은밀히 정신수양을 하였다. 이튿날 인정상관은 측근에 있는 추종자들에게 이르기를, "누구누구가 지금 어디에서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를 하고 있제" 하시고 음식과 과일 등을 보내 주게 하였으니 이날이 바로 계사년 동짓달 초사흘이었다.
이때부터 인정상관 문하인들은 그 수련법을 가리켜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라 하였다. 그때 그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개 고칠 수 없는 고질을 지닌 자들이었는데 이들이 21일의 수련을 마치자 그 고질이 깨끗이 나았고 그 중에 경산 사람 조용진의 곱사등이 펴진 기적이 있었다. 다만 정읍 사람 최동환은 어려서부터 골수염을 앓아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던 자였는데 함께 수련을 마쳤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때 함께 수련했던 도우들은 그에게 위로하여 말하기를, "자네 다리는 비록 수련으로 치유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인정상관님을 더욱 믿고 따르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였다. 그날 최동환은 자기 집에 돌아와서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를 계속하였다. 사흘 후에는 골수염으로 앓고 있는 다리의 발등이 아무런 통증도 없이 멀겋게 부어올랐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뒤안에 있는 대밭에 들어가 가느다란 대가지를 끊어 그 끝을 날카롭게 하여 부어 오른 발등을 찍으니 한 사발 가량의 고름이 쏟아졌다. 그런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으며 한참 후에 보니 상처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최동환은 그 골수염이 치유되어 수십 년 동안 완전한 사람으로 살았다(최동환은 노년인 근래에 그 골수염이 재발하여 죽었다고 한다). (맥이 212p)
좌담
다음은 인정상관이 선화仙化할 무렵의 이야기와 인정상관이 전한 덕의 내용에 대한 대화로서, 필자, 한광수 원장, 임상화 씨, 김영곤 씨, 유세영 씨가 문답한 것이다.
필자: 인정상관님께서 선화하실 무렵의 일을 알고자 합니다.
한광수: 어른께서 선화하시기 몇 달 전인 갑오년 가을에 몇 명의 추종자를 불러 머리방 뒤쪽으로 금을 그어 주시며 높이를 일러 주고 시멘트로 광을 만들라는 분부가 있어 그 말씀대로 봉행하였다. 그해 섣달에 어른께서 운명하셨는데 그 자리에 가빈을 하니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딱 맞았다.
필자: 운명하실 때 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좌탈을 하셨는지요?
한광수: 아니다. 보통사람과 같이 누워 계셨다.
필자: 선화하실 때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지요?
한광수: 그때 김순덕이라는 여인이 운명하시는 어른의 손을 잡고 슬피 우니 어른께서, "울지 마라. 내 다시 오마" 하셨다.
필자: 103일 동안 방에다 가빈으로 모셨는데 물이 흐른다거나 냄새가 나는 일은 없었는지요?
한광수: 우리도 그러한 일을 대비하여 바닥에 유지를 깔았으나 그 유지에 물 한 방울 없었고 방에는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다.
필자: 인정상관님께서 선화하셨을 때 추종자들의 마음은 어땠는지요?
임상화: 우리는 그 어른께서 꼭 무슨 일을 하실 것으로 믿었는데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필자: 상여 소리가 먼 데 사는 추종자들에게도 들렸다는데 사실인가요?
한광수: 지금도 그 일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다.
필자: 인정상관님을 추종했던 무리들이 수만 명이 있었다는데 그분의 성탄제에 참예하는 사람이 어찌 이처럼 적은지요?
김영곤: 추종자들 가운데 허령들린 자들이 그 연비를 달고 나가서 무슨 종교를 창설했기 때문에 여기는 이처럼 못난 늙은이들만 남아 있다.
필자: 그러한 종파가 몇이나 되는지요?
유세영: 50여 파가 넘는다.
필자: 그들은 대개 누구를 숭상하는가요?
임상화: 인정상관님을 숭상하는 파도 있는데 대부분 객귀를 숭상한다.
필자: 인정상관님께서는 생존시 종교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임상화: 그렇다. 우리가 그 어른께 여쭌 적이 있었다. "우리는 교명을 무슨 교라고 합니까?" 했더니, 그 어른께서 대답하시기를, "교는 무슨 교? '교징교'라고나 할까? 남들 잘못하는 것 잘하라고 시키기나 하지. 도덕 아니면 못산다고 해" 하셨다.
필자: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에 어떤 뜻이 있는가요?
임상화: 인정상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마음을 바루고 보면 천지도 바루어지고 세상도 바루어져서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잘살게 된다" 하셨다. 지금 인류의 대병을 고치고 천하의 대난을 평화로 돌리려면 먼저 인류의 마음부터 바루어야 할 것이다. '마음 바루는 의원공부' 이 말씀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심원광대한 뜻이 있으니, 즉 땅 하늘이 운수와 대도의 진리에 합치되는 수련인 것이다.
필자: 어떠한 자세로 하는가요?
- 마음을 바로하고 몸의 자세는 방정하게 한다.
- 마음과 몸을 편히 하고 기분을 화하게 갖고 믿음을 굳게 한다.
- 앉아 있을 때나 또 걸을 때에나 항상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아랫배를 자연스럽게 한다.
- 호흡은 단전에 미치도록 가늘고 길게 종용從容히 한다.
- 마음은 단전에 부착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마음' 이 땅으로 내려가고 '땅의 정성'이 하늘로 올라가는 천지상교, 즉 땅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
필자: 금기하는 것이 있는가요?
임상화: 평상시의 수련에는 없으나 날짜를 정하여 본격적인 수련을 할 때는 오기五忌가 있다.
필자: 오기는 무엇무엇인가요?
임상화: 첫째는 불신이요, 둘째는 설기泄氣요, 셋째는 집착이요, 넷째는 환희歡喜요, 다섯째는 욕속欲速이니, 이상의 다섯 가지가 모두 대병이 되는 것이라 마음이 사도에 떨어지리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필자: 인정상관님을 옛날의 어떤 어른과 비교할 수 있겠지요?
임상화: '관어해자 난위수'라는 말이 있다. 즉 바다의 광대함을 본 사람에게는 웬만한 강물의 크기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의 문하에서 그 도의 위대함을 보고 들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언설도 의미가 없다. 그 어른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어른이시다.
작년 겨울, 김제 금산사에서 명상을 마치고 나오면서 입구 근처에 있다는 인정도덕원을 찾았다. 인정도덕원 표지판을 지나니 인정상관님의 생가가 있었는데 마침 아무도 계시지 않아서 궁금한 것을 여쭈거나 하지는 못했다. 문이 잠겨있진 않아서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인정상관님이 생전에 신으신 듯한 신발이 모셔져 있었다. 신발이 낡아 헤지도록 신으셨던 것 같다. 아궁이가 있는 옛날식 부엌도 볼 수 있었다.
동작이 자연스레 절을 하고 합장으로 예를 갖춘 뒤 물러나게 되었다. 겨울에는 문지방사이로 웃풍도 꽤나 들어올 것 같은데 인정상관님은 솜이불 하나도 따뜻하게 덮지 않으셨다고 한다.
≪본주대경전≫이다. 생가 옆에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 경전을 구할 수 있을까 하였지만 마침 아무도 계시지 않아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본주 상,하권≫보다 더 상세히 어록이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정상관님을 알게 된 것은 증산도맥의 교조이신 강증산 대선생의 신성화를 고려하기위해 자료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인정상관님의 신성화는 영적 중심과 세상 중심에서 발하는 에너지의 장이 너무 커서 옆으로 모두 확장하였으며 총 7장의 종이가 사용되었다. 현재 드러난 인정상관님의 신성화 에너지 구조는 전체에서 매우 일부임을 밝혀둔다.
우리나라 증산계열의 여러 단체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있고 진법과 난법, 맥의 연원에 대해서는 서로간에 의견 차이가 심하고 매우 예민한 문제여서 인정상관님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쓰지 않았다. 인정상관님의 신성화에 대한 설명도 생략하였다. 그동안 신성화 블로그를 보아오셨던 분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정상관님에 대한 질문은 사양하며 책의 내용을 통해 각자가 판단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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