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
에너지 그림 설명 :
1. 높은 상위 차원의 중심이며 무한대 상징이 드러났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 그러한 기도가 지속적일 때 드러난다.
2. 프란치스코의 영적 중심이다. 주황색의 빛의 상징이 드러났다.
3. 광배이다. 금색, 녹색, 노랑, 은색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푸른 에너지가 방사되고 있다. 광배는 상위 차원으로 이어져 영적 중심을 감싸고 있다.
4. 영적 중심선에 마디가 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 도약의 흔적이다.
5. 머리에서부터 발산되는 보라색의 영적 물결이다. 주변으로 주황색의 사랑의 에너지가 퍼져나오며 그 바깥으로 푸른색의 에너지가 회전하고 있다.
6.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또는 성흔, 스티그마타Stigmata 라고 불리우는 성스러운 표식이다. 신성화에서는 물질이 영적 차원으로 바뀌는 통로의 의미로서 마름모 상징이 드러났다.
7. 발 아래로 현실 중심선에 이중 나선Double Helix이 드러났다. 프란치스코 자신의 길이 강하게 확장되는 의미이다.
8. 이 나선Helix은 그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확장됨을 의미한다.
1202년 이탈리아 중북부의 아시시Assisi라는 작은 마을에 프란치스코 드 베르나도네(1182-1226)라는 청년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용모가 준수했고 앞길이 창창했으며 주변에는 늘 친구들로 북적였다.
13세기의 이탈리아는 전쟁이 빈번했다. 왕은 교황과, 도시는 이웃 도시와, 귀족들은 상인과 싸웠다. 그러한 어둠의 시기에 작은 마을이었던 아시시에서 프란치스코 드 베르나도네는 낙관적이며 즐거운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옷감 상인이었고 많은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일군 부유한 집안의 재산은 모두 프란치스코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1202년, 아시시와 이웃 도시인 페루자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모든 것이 보장되었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고향 아시시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지하 감옥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
그 힘든 과정속에서 프란치스코는 다시 세상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고 공허했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고 전쟁에서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보였던 것이다.
감옥에 갇힌지 1년 뒤에야 프란치스코에 대한 몸값이 치뤄졌고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프란치스코는 방황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폐함과 상처로 인해 인생에서 기대했던 낙관적인 이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반쯤 무너진 산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성당에 걸려있던 십자기를 보았고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내 집이 보이느냐? 가서 나를 위해 다시 지어라’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산 다미아노 성당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던 프란치스코는 성당에서 삶의 전환점을 만났던 것이다.
그 이후로 프란치스코는 성당에서 계속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에게 어떤 영적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옷감을 가져갔으며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다. 프란치스코를 다그쳤던 아버지는 결국 성당의 주교를 만나 프란치스코가 더 이상 성당을 수리하기 위해 자신의 옷감을 팔지 못하게 하고 그 돈을 돌려받고자 하였다.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이 성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나타나 성당으로 들어갔고 입고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르기로 기도하며 아버지와의 의절을 선언했다. 광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앞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자 주교는 벌거벗은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망토로 감싸주었다.
프란치스코가 그 광장을 떠날 때 마을사람들은 프란치스코를 향해 미친 사람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길로 아시시를 떠난 프란치스코는 방랑 생활을 하며 서서히 변화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아시시 주변 숲과 언덕에서 내면의 탐구를 이어갈 때 어느 계곡에서 나병환자를 보게되었다. 아시시의 성 밖으로 나병환자를 격리시키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게 된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 까지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아랑곳하지 않고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에게 다가가 그들을 껴앉고 키스해주었다. 이것은 그의 내면의 영성이 현실로 드러나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그는 그 때 나병환자를 그리스도로 보았던 것이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저를 그들 안으로 이끌었고 저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의 상처에서 고름을 씻겨내고 돌보았고 그들의 아름다움과 영혼을 알아보았다.
“역겨워서 피하기만 했던 것이 이제 내 영혼과 몸에 달콤함으로 변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랑하는 것과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모든 삶의 목적인 것처럼 기쁨에 넘쳐 살았다.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제가 새로운 차원의 바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구걸하며 다녔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삶을 살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세상으로부터 고통받는 이들을 복음으로 이끌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당시 교회가 가진 부유함과 특권, 정결 서약을 어기고 탐욕스러웠던 사제들의 행태와 프란치스코의 삶과 메시지는 대조되었고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설교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고 교황이 있는 로마로 떠나게된다.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맨발의 허름한 옷차림을 한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접견하게 된다. 추기경들은 프란시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힐난했지만 이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설교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한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따랐지만 극도의 가난속에서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점점 무너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프란치스코는 제5차 십자군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향하게 된다. 십자군과 무슬림의 전쟁속에서 순교하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는 처참한 전쟁의 광경속에서 십자군 기사들 또한 살인을 일삼는 전쟁광이나 다를게 없었다고 느꼈다.
무슬림의 술탄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야만인일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 만난 술탄은 공손하고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일루미나토 수사와 붙잡히게된 프란치스코는 술탄 앞으로 끌려가게 된다.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당당히 말하는 프란치스코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긴 술탄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쟁 대신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술탄이 자신만큼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인식을 얻은 프란치스코는 5차 십자군 전쟁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형제회는 점점 커져갔지만 그만큼 문제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의견들도 많아졌고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가난과 무소유를 선택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로인해 프란치스코는 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영적인 고통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마치 송장이 된 듯합니다. 당신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가고 차지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여러분에게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형제회 대표직에서 물러난 프란치스코는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리베르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40일 낮과 밤을 기도하면서 보내고 있을 때 신비스러운 체험을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성흔, 스티그마타Stigmata)이 프란치스코의 몸에 발현된것이다.
그 뒤로 병으로 수척해진 프란치스코는 조용히 육신을 내려놓았다. 그의 나이 44세였으며 그가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간지 2년 만에, 로마 교회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했다. 그리고 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아시시에 대성전이 지어졌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성화를 완성한 후 떠오른 한 마디는 '숭고한 사랑' 이었다. 머리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보라색의 영적 물결은 그의 삶 속에서 내가 봐야할 장면들로 계속 이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책과 영화는 많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성 프란치스코(2016)'도 추천하고 싶다. 드라마틱한 극적인 전개는 아니지만 그의 생애 후기를 잔잔하게 다루면서도 형제회 내의 갈등과 고통속에서도 영적 소신을 포기하지 않는 프란치스코의 영혼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포스터를 보면 촛점이 좌측 인물에 맞춰져있는데 그는 프란치스코가 아니라 그의 형제였던 엘리야이다. 주연인 프란치스코(오른쪽)는 오히려 촛점이 흐려져있다. 영화를 보고나면 이유를 알게된다. 보는 내내 극중 인물에 나 자신을 대입하게 되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던 중 텐진 빠모 스님의 책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관련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아래 인용한다.
딱히 어디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저 묵묵히 그 ‘목소리’ 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친구들이 텐진 빠모를 자기 나라로 초청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텐진 빠모는 미국, 호주, 영국을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마음이 가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인도에서 만났던 미국인 친구 램이 텐진 빠모에게 꼭 맞는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곳이 바로 아시시였다! 그는 자기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지내자고 청했다. 텐진 빠모는 아시시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듣자마자, 마음의 목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응답했다.
‘바로 거기야.’ 텐진 빠모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텐진 빠모는 감상적인 생각이나 슬픔에 잠기는 일 없이 담담히 크나큰 행복을 선사해 주었던 동굴에서 떠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곳에서 서른세살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그 긴 세월 동안 삶의 전성기를 다 보냈지만, 텐진 빠모에게 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 긴 시간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거였어요. 훌쩍 시간을 뛰어넘어 버린 것만 같았죠. 특히 마지막 3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 같았어요. 기껏해야 넉 달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텐진 빠모는 차근차근 짐을 꾸리고 라홀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마침내 가장 찬란하게 서구 문화의 꽃을 피웠던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로 향했다. 텐진 빠모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구에서 떠났다가 다시 서구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텐진 빠모는 움브리아의 수바지오 산비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중세 마을 아시시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텐진 빠모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산꼭대기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그림 같은 집들이 라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서인지, 대기 중에 아직도 성 프란체스코가 남기고 간 거룩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 지역에 인도인 아쉬람이 몇 군데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텐진 빠모는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시시와 아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곳은 지금까지도 나의 동굴과 함께 유일하게 내가 그리워하는 곳이에요.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밀려들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뭔가 특별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할 수 있어요.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에요. 그곳은 세계 평화의 중심이며, 이종교 단체간의 회의도 많이 개최되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영적인 경험, 강한 변환을 경험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지요.” 텐진 빠모가 말했다.
중간 생략...
또 성 프란체스코가 살았던 동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산을 오르기도 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 동굴 속에서 예수의 고통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그의 손과 발에 성흔이 나타난 것은 물론 실제로 못 자국까지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텐진 빠모는 아시시에서 5년 이상 생활하면서 성 프란체스코에 대한 강렬하고 헌신적 사랑을 키워갔으며, 주변에 관광객이 아무도 없을 때면 성 프란체스코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곤 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250p ~ 252
개인적으로 텐진 빠모 스님의 전생의 어느 지점에서 아시시의 삶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화받아 복음의 삶을 선택했던 글라라가 아니었을까...
https://sacredart.tistory.com/93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하나 됨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평화의 기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또한 연설문에서 이 기도문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적이 없다.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뒤부터 그를 마지막까지 강하게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교황들은 프란치스코와 비교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극도의 복음적 가난과 무소유의 실천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성직으로 포장한 채 벌어지는 교회내에서의 범죄와 추문들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나는 어느 경계에 서있는 걸까? 예리한 영적 분별의 칼 끝을 내 자신에게 겨누어본다. 성 프란시스코를 성인으로 만든 것은 카톨릭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되새겨보며...
Sacred Art All Lists 신성화 전체 목록
https://sacredart.tistory.com/notice/32
Sacred Art Manual 신성화 매뉴얼 #1 : 기본적인 상징
https://sacredart.tistory.com/18
Sacred Art Manual 신성화 매뉴얼 #2 : 광배 光背Halo와 좌대 座臺Pedesta
https://sacredart.tistory.com/37
Email : omsacredar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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